언론속의 국민

그때 그들의 삶 문학서 표지 속의 풍경들/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일 20.07.29
  • 작성자 박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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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산수화에서 산수는 자연 그대로의 산과 물이 아닌, 인간이 도달하고픈 도의 경지를 보여주는 관념의 형상물이다. 자연히 환각적인 산세와 스토리를 품고 있으며, 조망시점 또한 다양하다.이에 비해 근대기에 탄생한 서양의 풍경화는 고정된 지점에서 조망 가능한 것을 보는 관찰자적 어법으로 되어 있다. 한국 근대기 문학서의 표지에는 이런 동서양의 화법이 혼종적으로 보이다가,점차 외부의 전경이 아닌 내면의 서사와 심성을 드러내는 풍경으로 변환되기 시작했다.이는 전통문학 속의 평면적이며 전형적인 주인공들이 사회와의 갈등을 표출하면서 입체적인 근대인으로 변모해나간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r 별건곤 j(개벽사,1933.7) 『천변풍경 j(박문사,1947)

 

r 별건곤 j(개벽사,1933.7) 『천변풍경 j(박문사,1947)
 

딱지본 속의 풍경들
초기 딱지본의 표지에는 낙관이 찍힌 수준 높은 산수화들이 등장했는데, 이는 상류계층의 서화문화를 대중들이 싼값에 향유하는 기회를 주었다는 평을 받는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자, 어진화가였던 소림 조석진이 그린 신소설 r철세계j의 표지를 보자. 청록산수에서 보이는 산과 계곡의 나무들과 함께 서구식 건물, 외국인들의 모습이 전면에 들어차 있다. 이 소설의 원작은 쥘 베른의「인도 왕비의 유산J으로 유토피아를 꿈꾸는 과학자가 만든 프랑스빌(Franceville)과 또 한 명의 힘을 신봉하는 과학자가 만든 슈탈슈타트(Stahlstadt, 강철도시)의 대립을 그린 것이다. 표지는 슈탈슈타트의 굴뚝과 공장에서 뿜어나오는 화력이 프랑스풍의 유럽 마을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해조가 중국판r철세계j를 한국어로 번안한 것으로, 제목은 프랑스 원작이 일본어로 번역될 때 바뀐 것이다. 힘의 공장과 철, 화력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당대 아시아 국가가 꿈꾸던 근대적 부국강병의 모양새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조시대 이인문의〈강산무진도〉 가 기계와 상업으로 흥하는 이상향이었다면, 소림의 이 표지는 오히려 철과 화력으로 인해 파괴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만가일 것이다.

이 표지의 대비되는 지점에 도화가 핀 산천 속에 한 가족이 등장하는r구의산j이 있다. 민화나 불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구름, 아홉 겹 중국 고사 속의 산세, 기와집 앞의 서판서 가족의 모습은 스토리를 품은 딱지본 표지의 전형이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표지는 잡지 r별건곤j의 표지로 이는 도심의 간판과 네온이 흐르는 풍경을 만화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당시 일본식으로 크게 제작된 간판들은 ‘경성 각 상점 간판 품평히’(별건곤, 1927.1)에서 김복진, 안석주의 대담을 통해 면밀히 비평을 받았고,“난장이가 큰 갓을 쓴 모양”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외부 경관에 감상자의 심미적인 태도가 중첩되어 환기되는 것이 풍경이라면,‘천당이 가깝다’
,‘웃음을 파는 가거『 등의 간판이 보이는 이 표지는 1930년대 흑백사진이 지닌 증거성, 사실성의 효과와는 다르게 당대 조선인의 심성 속에서 재해석된 풍경일 것이다.

「창德)j(정옴사, 1948) r 백록담/문장사, 1943)


근대 조선인의 삶의 자리
박태원의 소설 r천변풍경J의 표지는 박태원과 같이 월북한 그의 동생 박문원의 작품이다. 발터 벤야민이『아케이드 프로젝트j에서 “거기에는 또 다른 표시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안젤라 2층 우측” 등 ‘문학적 몽타주’로 불리는 메모로 당대 유럽의 심장 파리의 일상을 재구성하던 시기, 조선의 대표 모더니스트 박태원 역시 산책자가 되어 근대 조선 도심의 대중의 삶을 단상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박문원은 그 군상들의 한순간을 표지속에 각인한 것이다.“청계천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한다. 딸 이쁜이를 시집보내는 이쁜이 어멈, 한약국 집 귀돝 어멈, 수다스럽고 성깔 있는 점룡이 어멈 등등” 이렇게 시작하는 첫째 장면을 아낙네들과 거적,굴렁쇠 소년, 망건을 쓴 노인의 모습,‘구렁이 살모사’ 등의 간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해, 마치 천변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가 디자인한 또 하나의 작품,무헌 유진오 시집「창(窓시을 보자. 유진오는 지리산에서 문화 선전대로 활동하다가 군사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이 된 시인이다. 표지는 조선시대 한양도의 형식으로 성벽 안에는 철도와 기차, 기와집, 고층 건물들이, 성 밖에는 수없는 초가가 빼곡히 그 주변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다. “낡은 성 밑 군풀 우거진 곳에, 해와 바람은 등져도, 비에는 명색도 없는 창” 의 시구처럼, 해도 바람도 못 받는 대중들의 남루한 삶과 자산가들의 화려한 삶을 암묵적으로 대비했다.

내면의 풍경과 추상적 풍경
이렇게 일상의 삶을 그린 풍경과 또 다른 시인들의 내면 풍경을 보자 정지용의 시집 r백록담j 표지는 그의 제 주도 여행에 동행한 길진섭이 디자인했다."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나의 얼굴에

호홉씨작사, 1954)                    고란초/문영사, 1948)          제3인간乳(을유문화사, 1954》

 

「백두산등척기 j(유성사서점, 1931)      r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문학과지성사,1978)
                                           (도서출판 나남, 1986)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j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라고 끝나는 백록담에서의 이 쓸쓸함이 앞표지와 뒤표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슴들로, 마치 환각처럼 앞에 그들에게 날아온 나비로 표현된 듯하다. 윤동주의 r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J에서 보이는 프러시안 블루, 검은색과 흰색의 어두운 밤 언덕은 한국인의 가슴에 영원히 순수의 청년으로 남은 윤동주의 생을 보여준다.
이덕성의 시집『호흡J의 표지는 장욱진의 작품이다. 산수화 속의 평면적인 인물이 이 표지에서는 구체적인 표정의 인물로 생동한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동그란 해와 햇살, 나무와 새의 조우만으로 이덕성이 잡으려한 ‘영롱한 생동’이 구현됐으며, 제목 역시 무심한 느낌의 캘리그래피이다.「고란초j는 초미니멀리즘적 구상을 보여주어,“풍경은 조망되는 자연 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망하는 인간 측에 존재한다”라는 언설을 입증한다. 김환기가 디자인한 r제3인간형」표지 속의 사슴 또한 추상적 구상의 예시로 길진섭의 사슴과 대조된
다. 이렇게 근대기 표지들은 외부의 풍경을 빌려 당대의 사건들과 인물, 서정을 묘사하며 대부분 무심한 손 글씨의 제호는 그런 풍경에 자연스레 삽입되어 있다. 하지만 안석주가 디자인한 r백두산등척기J의 기하학적인 선과 활자체 제목은 1930년대에는 보기 힘든 돌발적인 현대적 미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감각은 후대의 정병규가 디자인한1■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j의 표지와 쌍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문열이 그려낸 이 고향은 이미 도시화의 열풍으로 사라져가기 시작한 기억 속의 고향이다. 그렇기에 격자의 그리드 속에 놓인 사진 속의 풍광은 깨끗하게 정돈된 제목과함께 말끔해진 현대 도시의 감성으로 재해석한 고향의 모습으로 다가온다.이 외에도 여러 문학에 녹아든 한국인의 삶은 디자이너 혹은 화가의 손을 빌려 한 장의 풍경으로 남겨졌다.^창」의 표지에서 한강 다리를 찾아보고,r구의산j에 펼쳐진 복사꽃과주인공 오복이의 표정을 들여다보라.‘윌리를 찾아라’의 흥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척박한 시기, 이 땅을 살아냈던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들려올 것이다. 하지만 삶의 구체적 표현이 주는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현대인들은 이후 추상화로서의 풍경을 선호 했고, 1950년대 이후 풍경을 그린 표지는 추상화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표지는 삶의 구체성과 표정을 도시호h 산업화의 거대 명제로 빼앗긴 한국 가족의 추상적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함아리,2018)를 출간했다 •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으므로 자료의 무단복제 및 사용을 금합니다.

 


원문보기: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2220189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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