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올림픽 공원의 세 가지 조형물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일 20.07.17
  • 작성자 박윤진
  • 조회수 982
  • 첨부

우리 주변에서 텅 빈 곳은 공간(Space)이라고 불린다. 이곳엔 인간의 흔적이 없다. 여기에 인간이 발을 내딛어 이정표를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 이 공간은 비로소 장소(Place)가 되며 인간 역사의 한 장으로 편입된다. 모든 공간과 장소는 한정이 있기에, 각 세대는 자신에게 할당된 것들을 허물기도 하고, 빈 곳을 개발하면서 양피지의 얼룩처럼 자신들의 흔적을 남긴다. 한국은 88 서울올림픽을 위해 경기장, 선수촌, 공원을 지었고, 한 세대 30년이 지난 지금 이 장소는 활발한 재개발의 테이블 위에 올라 와있다. 국민소득 4,500달러 시대, 전후 30년 만에 한국이 이룩한 변화를 ‘어떻게’ 전 세계에 알리느냐는 군정권이나 그 정권과 함께 축제를 기획했던 문화계에게나 고심이었을 것이다.

기억, 전통, 과거와 스포츠 문화

이 ‘어떻게’ 즉 모든 것의 형식이 곧 문화이다. 우월한 달리기 능력은 타고난 자연의 영역이지만, 이 능력의 발전, 경쟁의 모양새 등은 문화의 영역이다. 올림픽은 모든 스포츠 문화의 정수이고, 디자인은 이 최고의 스포츠 문화의 물적 기반이기에, 올림픽을 위한 문화 디자인 콘셉트와 그 발현 양상은 그대로 한국의 문화적 위상이기도 했다. 당시 올림픽 경기를 위한 각종 시설과 문화 행사는 한국의 거의 모든 국가 행사가 그렇듯이 전통이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과거는 이미 지났다는 안정감, 익숙하다는 친근감과 더불어 우리의 현재를 대변해주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식민제국에 의해 역사를 말살당한 우리에게 전통적 소재는 거의 매번 호명해야 하는 당위적인 논제인 듯 자리 잡았다.

이런 연유로 88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은 백자의 둥근 형상을 본뜬 콘크리트 기둥으로 세워졌고, 성화대 역시 두레박의 원리를 이용하여 점화가 가능하도록 제작되었다. 이후 2002년 10개의 월드컵 경기장 역시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경기장이 방패연, 고싸움, 돛단배 등 전통 코드를 기반으로 디자인되었다. 이렇게 기억, 전통, 과거 등은 스포츠 문화에서도 강세를 지니고 있다.

평화의 문’과 처마선의 복원

88 서울올림픽 문화물 중 43만 평 올림픽 공원에 건립된 ‘평화의 문’을 살펴보자. 이 조형물은 공원의 관문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 김중업 건축가가 디자인했다. 처음의 디자인은 24m 높이, 74m 길이에 37미터 폭의 지붕이 양쪽에 달린 구조였다고 한다. 하지만 군부정권의 호기 혹은 무지는 그것이 작다고 우겨댔고, 다시 높이 90미터에 폭 130미터로 재안이 올라갔지만, 이번엔 너무 크다고 주장했고, 결국엔 현재의 높이 24미터, 지붕길이 62미터, 폭 37미터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건축가가 재현하고 싶었던 것은 한옥의 기와지붕이 품고 있는 날렵한 처마의 선이었다고 한다. 칼로 자른 듯 직선으로 내려오는 일본 건축의 지붕선과 대조해보면 그 미감을 금방 느낄 수 있는 한옥의 처마선은 무심히 내려오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시 위로 사뿐하게 들어 올려지는데 그 휘어짐이 참으로 미묘한 맛을 풍긴다. 이들은 사각형들의 방, 대청의 디딤돌 등이 지닌 무겁고 각진 모양을 한 번에 부드럽게 하는 우
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건축가 김중업은 바로 이 처마선의 복원을 꿈꾸었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중앙의 거대한 기둥과 동으로 만들어지고 원색의 사신도로 채워진 지붕의 형상에서 그 선의 미감은 도저히 느낄 수 없다. 색은 언제나 형상보다 감각적으로 먼저 다가오기에, 형상이 지닌 미감 체험은 언제나 한발 늦다. 이 조형물 뒤로 양쪽으로 늘어선 모든 60개의 열주 가로등에는 취발이,
말뚝이 샌님 등 전통탈의 형상이 장식처럼 붙어 있다. 아무리 우리의 것이라고 해도 별로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 감각은 당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우로 스타치올리의 ‘88 서울올림픽’

또 다른 조형물 하나를 보자. 빨간 단색 하나로, 녹색잔디, 푸른 하늘 밑에서 강렬하고 담백한 형상으로 서 있는 조각이 있다. 밀라노 근교의 한 교회에서 완성되어 한국에 실려 온 이 조각의 제목은 ‘88 서울올림픽’으로 이탈리아 조각가 마우로 스타치올리(Mauro Staccioli)의 작품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다. “동작의 완벽성과 창조적 열망 사이에서 항상 균형을 유지하는 딸이 생각나고, 두 팔을 올리며 열광하고 있는 단 위의 선수들이 생각나고, 그런 기억 속에서 탄생 된 올라가는 동작의 한국올림픽 심볼”이라고. 이렇게 그는 “아치와 돔형의 둥근 지붕이 하늘을 형태적으로 비유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작품은 중력을 치고 오르는 내어 뻗는 인간의 기쁨, 승리, 도약, 동작의 완벽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두 팔을 벌린 거대한 한계를 초월해 신체를 넘어서는 기록을 남기려는 인간의 의지를 그는 구현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는 서사성이나 스토리, 재현의 명분에 대한 구속 없이 인간의 신체가 지닌 원초적인 시각성만이 존재한다. 이 두 개의 조형물 모두 기억과 전통과 과거에 의존하여 추상적 형상과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평화의 문’ 문화유산의 미학적 쾌감을 현대적 물성으로 재현하여 집단 정체성을 나타내려 했다면, ‘88 서울올림픽’은 인간 신체의 올라가는 동작이 지닌 아름다움과 힘을 추상적으로 응축한 것이다. 올림픽이 인간이 지닌 모든 신체적 가능성의 종합적 대결의 장이듯 이 조각들 역시 당대 문화거장들의 수위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은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

2019년 8월, 올림픽공원 야외잔디마당에 거대한 고양이 조형물이 일주일간 등장했다. SK텔레콤이 기획한 ‘AR(확장 현실) 동물원’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실제 크기를 보여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잠시 선보인 것이다. 진지하고, 추상적이고 의미가 충만한 조형물에는 관심 없는 대중들은 이 슈퍼 자이언트 고양이를 배경으로 수많은 사진을 찍으며, 자신들의 기억과 일상을 간직하고자 했다. 이를 보고 있노라니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앞의 강아지 조각이 떠올랐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꽃과 강아지, 그것 하나로 꽃, 강아지는 파산의 제프 쿤스를 구하고, 빌바오의 정문을 차지했다. “예술은 당신이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이다”라고 한 앤디워홀의 명제, “현대 예술은 예술가의 이것이 예술이라는 단언일 뿐”이라고 이야기한 아서 단토의 명제는 이 강아지 하나에서 다 실현된다. 올림픽공원이 재단장을 한다고 한다. 한 세대 30년이 지났다. 그리고 모든 문화의 판도 역시 급격히 변하고 있다. 명분이나 명목을 넘어서, 실재와 일상, 추상과 구상, 전통과 현재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스포츠 문화의 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시점이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를 출간했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