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나선 것은 순전히 김윤식 교수의 저술 덕분이었다. 김 교수는 최근에 펴낸 책,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을 통해서 소나무를 ‘ 유교적인 표상’으로 단언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단언한 근거 는 단지 솔숲이 서원이나 향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뿐이었다. 소나무가 가진 지조·절개·충절·기개 같은 상징은 선비의 덕목 으로 대입되고, 그 선비를 길러내던 유학 교육의 도장이 서원이나 향교임을 상상하면 김 교수의 해석을 수긍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행나무가 새겨져 있는 성균관대의 교표나 은행나무를 심어 공부하는 장소인 향교나 서원을 행단(杏壇)이라고도 불렀던 사실을 상기하면 유교의 표상은 오히려 은행나무로 인식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런 형편에 소나무를 유교적인 표상으로 끄집어낸 김 교수의 접근은 새로웠지만, 보다 자세한 소나무와 유교의 관계를 책에서는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 새로운 접근을 현장에서 직접 체득하고자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으로 나섰다. 여러 곳의 서원 중에서 소수서원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솔숲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은 이 땅 최초의 서원임에도 불구하고 인근 도산서원의 명성에 가려서 그 숨은 진가가 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특히 서원 주변을 감싸고 있는 솔숲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유학의 법도나 건물은 기억 해내지 못할지라도 낙락장송의 아름다운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꿋꿋하게 높고 큰 소나무’를 나타내는 낙락장송은 소나무와 유교, 또는 소나무와 선비를 연관지을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다. 우리는 사육신의 충절을 그들의 시를 통해서 배워왔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고 노래한 성삼문의 시나 ‘간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심하리오’라 고 노래한 유응부의 시에는 낙락장송인 소나무가 눈, 서리와 짝 을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음을 익혀왔다.
유교적 세계관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이 시들 속의 낙락장송과 눈 , 서리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눈과 서리는 속 성상 하얗게 세상을 덧칠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현상일 뿐 영속 될 수 없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의롭지 못한 세력이나 부조리한 세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청 청한 소나무는 변치 않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여 선비가 지켜야 할 덕목인 기개와 지조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아침 일찍 도착한 서원은 조용했다.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나선 한 산림학도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솔밭위로 지나는 바람소리는 정겨웠다. 소수서원의 학예사로 근무중인 박석홍 선생이 반 갑게 맞아주었다. 소백산과 태백산 인근의 양백지방(兩白地方) 문화유산에 자긍심을 가진 박 선생은 이 지방 소나무에도 관심이 많아 몇년 전부터 교류가 있던 사이였다. 먼저 서원 주변에 솔숲이 울창한 특별한 이유부터 물었다. 박 선생은 서원 내 강학당 뒤편에 자리잡은 직방재(直方齋)를 가리키 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스승들의 거처인 직방재는 주역 곤(坤)괘 문언전(文言傳)의 ‘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온 ‘직’과 ‘방’에서 유래되었 고, 이 구절은 선비들이 추구해야 할 마음공부의 목표를 담고 있다 고 했다. ‘군자는 항상 삼가며,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밖으로는 불의를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행동을 결단토록 한다’는 뜻을 가진 이 구절은 바로 선비정신의 표상이며 , 충절과 기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선비정신은 바로 소나무의 상징적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설명으로 이어졌다. 덧붙여 박 선생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추운 겨울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기백을 드러낸다(歲寒之木松柏)’는 구절이나 학문의 장구성을 뜻하는 천세지송(千歲之松) 역시 소나무와 선 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행설로 푼 소나무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소나무는 붉은 수피, 검은 솔방울, 푸른 잎, 누른 몸통 속, 그리고 흰 송진 처럼 오방색으로 표현할 수 있고, 오방색은 오행설과 맥을 같이 한다는 그의 설명은 그럴 듯했다. 소나무를 학자의 나무(學者樹) 로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그의 결론은 소나무와 서원의 관계를 밝히는 좋은 시작이었다.
그랬다. 이 명료한 설명은 비록 주역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로부터 소나무를 백목지장(百木之長) 만수지왕(萬樹之王) 또는 노군자(老君子)라 부르지 않았던가. 유교의 표상은 선비정신으로 나타나고, 그 선 비정신을 상징하는 나무가 소나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 말이다. 일찍이 박지원은 이렇게 설파했다. “천하의 공언(公言)을 사론( 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第一流)를 사류(士流)라 하고, 사해(四海)에 의(義)로운 소리 울리는 것을 사기(士氣)라 하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하고, 강학논도(講學論 道)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한다.” 바로 선비의 사회적 위치 와 영향력을 말한 것 아니겠는가. 학문을 강의하고 도를 이야기(강학논도)하는 사림은 바로 선비이며, 유학에 정진하는 학자를 일 컫는 말이다. 소나무는 선비들이 추구해야 하는 선비정신을 상징 하는 것임이 이로써 더욱 명백해진다.
그러나 소수서원 현장에서 본 소나무들의 모습은 걱정스러웠다. 일제시대의 옛 기록을 보면 연기봉을 비롯하여 서원 주변에는 ?진 낙락장송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오늘날은 솔숲의 곳곳이 비어있는 형상이다. 서원 입구를 지 키고 선 은행나무는 물론이고 솔숲의 나무들도 몇 년 사이에 노쇠한 모습이 뚜렷하다. 엄청나게 늘어난 관람객을 생각하면 나무 들의 쇠퇴 원인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수서 원이 400여년 동안 배출한 선비의 수가 모두 4000명이라고 하는 데, 오늘날은 하루에도 4000∼5000명이 출입하고 있는 형편을 감 안하면 나무들이 시름시름 앓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관광지가 된 서원의 운명 아니겠는가. 병들고 쇠약해져 점차 줄어들고 있는 솔숲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옛 조상들이 지키고자 애쓴 선비정 신이 오늘의 속된 여가문화 때문에 훼손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살아있는 문화유산을 지킬 방도를 적극적으로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