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영의 IT로 보는 세상] 노이즈 캔슬링 사회, 완벽한 연결이 만든 완벽한 단절
과거의 '군중 속의 고독'은 이제 '네트워크 속의 고독'으로 진화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떤 기본값으로 쓰고 있는가에 있어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삶에 '의도된 불편함'을 조금씩 허락해야 할 때
윤종영 님 / 캐리커쳐=한솔 제작
지하철에서 주위를 돌아보면 열에 아홉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 물론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 덕분에 우리는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도 고요 속에 있을 수 있다. 옆 사람의 통화 소리도, 지하철의 덜컹거림도, 환승 안내 방송도 모두 마법처럼 사라진다.
이 기술은 정말 놀랍다. 그런데 이 익숙한 풍경 속에는 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잘 담겨 있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원하지 않는 세상의 소리를 완벽하게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세상과의 연결 자체도 함께 지워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마찰'의 연속이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려면 점원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눠야 했고, 택시를 타면 기사님과 날씨 얘기라도 주고받는 게 자연스러웠다. 길을 모르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작은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기술은 이 모든 인간적 마찰을 '비효율'로 규정하고 매끄럽게 제거해버렸다. 이제 우리는 키오스크 화면을 터치해 주문하고, 앱으로 택시를 부르며, 위성항법시스템(GPS)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간다. 배달 앱에서 '문 앞에 두고 가세요' 옵션을 선택하면, 배달원과 마주칠 일조차 없다.
알고리즘이 지어준 맞춤형 독방
분명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타인과 우연히 교감할 수 있는 얇은 연결고리들을 잃어버렸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던 온기, 어색하지만 미소를 짓게 하던 짧은 대화들이 우리 삶에서 증발해버린 것이다.
더 심각한 단절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에서 일어나고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플랫폼들은 정교한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만 끊임없이 제공한다.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의 의견, 내 관심사 밖의 뉴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지루한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알아서 '캔슬링’해버린다.
과거에는 온 국민이 9시 뉴스를 보며 최소한 비슷한 사회적 의제를 공유했다. 하지만 지금은 옆자리 동료와 내 스마트폰 속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 각자가 알고리즘이 정교하게 지어준 '맞춤형 독방'에 갇혀, 자신이 보는 세상이 전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세계는 안락하다. 하지만 그 안락함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능력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대화로 이견을 좁히기보다는 피곤함과 적대감부터 느끼게 된다. 기술이 우리를 전 세계와 연결해주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우리를 가장 좁은 우물 안으로 밀어넣고 있는 셈이다.
연결되어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고, 소셜 미디어에는 수백 명의 '친구'가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화려한 일상들이 넘쳐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가벼운 연결은 내 깊은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받을 수 있는 진짜 관계를 대체하지 못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전시된 일상을 구경하는 '관객’이 되었을 뿐, 내 삶을 진정으로 공유하는 '동반자’를 잃어가고 있다.
과거의 '군중 속의 고독'은 이제 '네트워크 속의 고독'으로 진화했다. 기술은 '넓고 얕은 관계’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데는 최적화되어 있지만, 인간에게 진짜 위안을 주는 '깊은 관계’를 만드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모든 책임을 기술 탓으로만 돌린 건 아닌지 스스로 되묻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를 떼어놓고 있는 이 기술들의 원래 목적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물리적 거리 때문에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이 디지털 공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고, 소수자 집단이나 희귀 질환자 모임 같은 커뮤니티는 지금과 같은 기술 없이는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기술을 어떤 기본값으로 쓰고 있는가에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만 생겨도 스마트폰부터 꺼내는 습관, 어색함을 참기보다는 화면으로 도망치는 방식, 갈등을 풀기보다는 차단과 무응답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문화. 기술은 그저 이런 선택을 너무 쉽게, 너무 편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의도된 불편함을 선택할 용기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매일 누리는 편리함 이면에, 인간성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이 깎여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기술이 모든 마찰을 없애준다면,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삶에 '의도된 불편함'을 조금씩 허락해야 할 때다. 이어폰을 빼고 거리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 배달 앱 대신 동네 식당에 걸어가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것, 알고리즘 추천 대신 서점에서 우연히 책을 발견하는 것.
스마트폰이 없는 30분을 견딜 수 있는지, 불편한 대화를 메시지로만 처리하지 않고 직접 만나서 해볼 용기가 있는지, 나와 다른 생각을 한 번쯤 끝까지 들어볼 인내심이 남아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진정한 연결은 약간의 불편함과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완벽한 노이즈 캔슬링의 시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기술은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고 고개를 들어 내 앞의 사람을 바라보는, 아주 오래되고 아날로그적인 용기일지도 모른다.
기술이 우리를 사회와 세상에서 떼어내고 있다면, 그 줄을 끊은 것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아닐까. 나는 그 질문을, 내 손에 쥔 작은 화면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