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기술이 어우러진 AI 주권국… 한국 AI가 만들어갈 미래 / 김재준(국제통상학과) 교수
우리는 매일 구글에 정보를 검색하고 유튜브로 영상을 본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챗GPT에 궁금한 점을 묻는다. 이때 생성되는 데이터는 어디로 갈까. 대부분 미국 빅테크 기업 서버로 전송된다. 우리가 만든 데이터로 인공지능(AI)을 학습시키고, 그 AI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창출한다.
데이터는 21세기 원유로 불린다. 우리는 원유를 무상으로 넘겨주고, 이를 정제해 만들어 석유 제품에 비유되는 고부가가치 AI 서비스를 다시 값비싸게 사온다. 이뿐 아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나 애저(Azure) 같은 미국 클라우드·컴퓨팅 서비스에 의존하며 잠김(Lock-in·로크인) 효과에 빠져든다. 특정 기술이나 플랫폼에 의존하면 다른 서비스로 쉽게 옮겨가지 못한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디지털 덫에 걸리는 셈이다. 게다가 미국 클라우드법은 자국 정부가 요구할 경우 미국 기업이 해외에 보유한 한국 데이터도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국이 디지털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글로벌 자본을 이긴 K-AI 힘
그래도 희망은 있다. 한국 언어 및 문화에 최적화된 선택과 집중 전략이 글로벌 자본을 이긴 사례도 있다. 대표적 예가 네이버다. 2024년 기준 네이버는 국내 검색시장 점유율 약 58%로 구글(약 33%)을 앞선다. 한국인의 문화적 취향에 대한 깊은 이해, 사용자가 직접 생성한 콘텐츠 중심의 생태계, 방대한 한국어 데이터가 성공 비결이다. 과거 마이크로소프트(MS)가 워드 시장을 지배한 시절에도 토종 소프트웨어 ‘아래아한글’이 공공·교육 시장 표준으로 살아남았다.
이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경쟁에서 벗어나 K-AI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 K-AI는 단순한 기술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적 가치와 철학을 담은 종합적인 AI 생태계다. 범용 AI는 특정 대상의 표면적 특징만 어설프게 흉내 낼 뿐이지만, 원천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 기업이 수년간 축적된 작화 데이터와 이야기 전개 방식을 학습시킨 전용 어시스턴트 AI를 개발한다면 어떨까.
웹소설이 시초인 ‘나 혼자만 레벨업’도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등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한국형 IP다. AI가 작가의 고유 화풍과 세계관을 완벽하게 이해해 창작 파트너로 협업할 날도 머지않았다. 칼군무로 유명한 아이돌그룹 세븐틴도 마찬가지다. 안무 연습 영상과 멤버별 동선 데이터를 학습시킨 안무 구성 AI를 만든다면 그룹 특성과 곡 감정선까지 고려한 창의적인 안무를 제안할 수 있다. 데이터 주권에 기반한 K-AI가 독점적 경쟁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세계가 만드는 자국형 AI
한국은 문화강국이자 IT 강국이다. 여기에 AI가 더해지면 삼각 편대가 완성된다. 문화는 콘텐츠와 데이터를 제공하고, IT가 인프라와 플랫폼을 구축하며, AI가 혁신과 가치를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다.
그동안 국내 문화예술은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후원 대상에 머물렀다. 이제는 경제에 기여하는 주체로 도약할 수 있다. 문화는 AI의 한계를 시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시험대다. BTS가 국내총생산(GDP)을 끌어올렸듯이, 문화와 기술이 융합된 K-AI는 새로운 한류를 이끌 것이다.
참고할 만한 선례가 있다. 프랑스 AI 스타트업 ‘미스트랄AI’는 자체 최첨단 모델을 개발하면서도 일부 모델은 오픈소스로 공개하는 혼합 전략을 쓴다. 엔비디아와 파트너십을 맺어 블랙웰 그래픽처리장치(GPU) 1만8000개를 확보했고, 40MW 규모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유럽의 주권 AI 생태계를 선도하고 있다.
싱가포르도 5200만 달러(약 719억6800만 원)를 투자해 동남아 언어 특화 AI인 ‘시라이언(SEA-LION)’ 프로젝트를 오픈소스로 진행 중이다. 이는 서구 중심 AI가 지역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일본의 사쿠라 LLM은 복잡한 경어체계를 반영하고, 네덜란드의 튤립 AI는 프리지아어(프리슬란트어) 같은 소수 언어도 지원한다. 아랍에미리트(UAE)의 팰컨 모델은 아랍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언어 구조까지 반영했다. 이들은 글로벌 기업과 협력하되, 자국 정체성을 잃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우리가 추구할 방향도 이와 같다.
한국도 대형 LLM만 추구할 게 아니라, 우리에게 알맞은 모델을 목표로 해야 한다. K-AI는 창조성을 존중하고 문화적 깊이를 담아내는 윤리적 AI를 지향한다. 핵심 키워드는 투명성과 책임감, 창작자 권리 보장, 공동체 가치와 인권 존중, 문화적 정체성 통합이다. 이러한 철학까지 담을 때 한국만의 소프트파워를 구축할 수 있다.
거대 기업의 디지털 식민지로 남을 것인가, 문화와 기술이 어우러진 AI 주권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정부는 기반을 마련하고, 민간은 그 위에서 꽃을 피워야 한다. 실리콘밸리처럼 전 세계 인재가 모이는 허브를 만들기 위한 정책도 절실하다. 우수 인재의 유출을 막고, 동시에 해외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거대한 AI 파도에 휩쓸릴 것인가, 그 파도를 타고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가. K-컬처라는 돛을 올리고, AI 주권이라는 나침반을 들고, 미래를 향한 항해를 시작할 때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