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속의 그녀들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한국 최초의 여성잡지는『가덩잡지』(1906, 가정잡지사)로 유일선과 신채호에 의해 순 한글로 발간됐다.
이 잡지에는 ‘맹자의 어머니 속이지 아니한 일’,‘김유신 참마(新馬)’사건이 그려져 있다. 이들 이야기 뒤의 현명한 아들을 길러낸 어 머니로서의 단일한 여성상,사회와 공동체가 부가한 이상적 여성상이 제안된 것이다. 김유신의 참마사건이 현재 일어난다면 당대의 아이돌 화랑 김유신은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고발당할 것이고,기녀 천관에 대한 동정론과 더불어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시각과 권위의 편에 대부분 자리한다. 장구한 여성과 남성의 역사 속에서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들은 근대기 대중적 복제 매체의 등장으로 무명으로나마 역사에 그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추월색j(191 之 회동서관》 ■홍도화j(1912, 동양서원)
딱지본 속 수난사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봉건질서와 구습, 새로운 가치가 혼융되던 시가 주로 수난받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막장 이야기가 만들어졌고,그들은 대중의 최고의 여흥거리였다. 딱지본이라 불리는 이 신소설의 표지에서 주인공 여성은 고독한 산속의 여인에서부터 납치, 자살, 투신, 익사, 보쌈의 대상으로 재현됐다. 이 중 최초의 근대적인 신혼여행이 등장한 r추월색j에는 고뇌하는 주인공 영창과 정임의 모습이 일본 우에노 공원의 불인지(不認池) 관월교(觀月 橋)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정조를 지킴으로 신생활의 꿈을 이루어내는 내용으로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욕망이 결합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채만식의『태평천하/에서도 등장하는데, 주인공 서울아씨는 "추월색 책을 천독을 하여 따르르 외고” 있으며,“마음이 무시로 싱숭생숭할라 치면 얼른 r추월색j을 들고 눕는다”고 묘사된다.
관재 이도영이 그린『홍도화j를 보자. 냇가에서 빨랫감을 앞에 놓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주인공 이태희는 조혼의 굴레를 거부하고 길을 찾아 나서는 선구적 여인이다.
r신출귀몰■!에서의 민화의 환각적 기법으로 둘러싸인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그려진 양옥, 기차, 항구 등은 이국적 로망을 제시한다. 주인공 이씨부인은 시계모의 계략에서 탈출하여 남편을 찾아 일본으로 떠난다. 이들은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거부하고, 새롭게 불어오는 근대의 바람결을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가기 시작하는 여인의 원형일 것이다.
r부인j 창간호(1922.6, 개벽사) r신여성j 창간호(1923.9, 개벽사》
사색하는 신여성
이런 1910년대를 지나 개벽사에서 1920년대에 발간한 r부인j과1•신여성j으로 대표되는 여성지에는 자아를 찾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r부인j의 창간호에는 단아하게 쪽을 진 무표정의 한복 여성이 등장하는데,이는 단지 미인일 뿐이다.
r신여성j으로 제호를 바꾼 후 첫 호에는 뭉게구름 피는 바다에서 꽃을 들고 그것을 바라보며 서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 모습은 1년 후 단발을 하고, 역시 바다를 배경으로 깊은 내면의 사색에 잠긴 여성의 모습으로 바뀐다. 당시 바다는 신지식과 모험의 표상이었기에 이러한 바다에 여성이 자리 잡은 것 역시 상징적이다. 이후「신여성j표지에는 ‘플래퍼(Flapper)’라 불린, 내밀한 욕망을 표현하는 모던걸, 책을 들거나 호화 액세서리를 두른 여성, 턱을 치켜들고 깃털 펜을 든 모습 등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이런 표지 속의 이미지는 독자란에 투고된 독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그 수위가 조절됐다고 한다. 이 같은 와중에 새 조롱에 갇힌 여성의 사진으로 그 처지를 묘사한 기생들의 잡지 "장한j이 탄생했으며,r물새 발자욱j에서처럼 정지용의 시〈향수>(1927) 속 “아무렇지도 않고 예뿔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와 같은 여성의 모습, 카프 계열에선 건장한 노동자의 모습도 등장했다.
구원의 여성에서 욕망의 여성으로
대중서 속에서 여성들이 이렇게 그려지는 동안, 문학 작품 속의 여성들은 어떴을까? 이광수의 소설「사랑J에서는 존경하는 안빈에 대해 깊은 사랑을 품고 있으나 그 사랑을 아가페적인 헌신과 희생으로 승화시키는 주인공 석순옥이 가냘 프며, 현숙한 아름다움의 여성으로 그려진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를 보자.
「사랑교1936, 박문서관》 1■여성j의 ‘나와 나타샤와 횐 당나귀'(1938.3)
r신여성j(1924.9, 개벽사) 「자유부인 j(1954 정음사》 「샘이 깊온 물j 창간호(1984, 뿌리깊온나무》
시인은 “(…)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사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 응앙음앙 울을 것이다”라는 시를 부모의 강압에 의해 헤어지기 전날 기생 연인 자야에게 써준다. 그는 가난한 시인의 사랑을 받아줄 흰 눈, 흰 당나귀처럼 순수한 여성을 갈구한다. 두 작품 모두 정현웅의 것이다.
해방 후 김남천의 r사랑의 수족관J에서 거부의 딸인 주인공 이경희는 사랑의 격정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전 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자유부인j에서 대학교수 부인인 오영선은 립스틱을 붉게 바르고,전화기로 불륜을 속삭인다. 1930년대 플래퍼 이미지에 대응하는,해방 후 국가 재건 시에 등장한 ‘아프레 걸(Apres girl)’의 이미지이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인 황산덕이 “온갖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며(…) 문화의 적, 문화파괴자. 중공군 50만의 공격과 같다”고 비난해 더욱 인기를 구가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 1950년대부터 여성지 표지에는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미, 건강, 웃음, 섹시함의 코드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이 시대 여성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표지 속의 여성들이 어떠한 자세와 표정으로 등장하건,이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독자를 비껴가고 있다. 이 비껴가는 공간에서 거리감이 창출되며 보는 이와 피사체 사이의 여백이 생긴다. 이 시공간적 여백을 통해 관찰적, 관음적 시각이 만들어지고, 그 시각은 다시 자신의 존재성 혹은 욕망을 검열하는 자기검열의 시각으로 순환된다. 이후 한 세대 뒤 엔 이 깊은 물j(1984)은 종간까지 18년간 각계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일반 여성의 사진을 흑백으로 실었다. 창간호 속의 단아하면서도 당차 보이는 조선 여인의 후예를 일상의 평범한 여성들 속에서 호명한 것이다. 이들은 독자들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친다.
근대기 표지 속의 여성들은 출판디자인과 화가를 겸했던 이도영, 노수현, 정현웅, 안석주, 김용준, 김규택 등 쟁쟁한 남성들에 의해서 그려졌다. 이 부분에서 잠깐 생각해본다. 저 숱한 여성 이미지 속에서 아름답고, 빼어난 재주가 있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당차게 스스로 삶을 개척하려 한 여성들,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비극적 삶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예를 들면 나혜석, 김명순, 윤심덕, 강명화 등의 초상을 하나 고르라고 하면 어떤 것을 지명할 수 있을까? 아니, 혹시 우리 시대의 여성들에게도 현재 수없이 생산되는여성 이미지 중 자신의 것이라 지명할 수 있는 이미지가 과연 있을까? 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정정합니다. 지난 5월호에 소개된»■빛나는 제국«|을 r빛나는 지역j으로 정정합니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온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2018}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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