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을 놓고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도대체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박세일 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이 지난해 9월 노 대통령의 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한 것으로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은 노 대통령이 2월 24일 국회 연설에서 처음 말한 이후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잇따라 제기하면서, ‘동북아 균형자는 곧 미국’이란 그동안의 틀을 벗어난 한국 정부의 새로운 외교 독트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급변하는 21세기 동북아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 전략을 제대로 설정했다는 긍정론과 우리 능력 밖의 공허한 개념일 뿐 아니라 한미 동맹의 토대를 허무는 설익은 사고라는 비판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균형자 역할론이 생경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대해 문정인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장과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등은 공고한 한미 동맹 바탕에서 전통적 의미의 국력과 다른 연성 국력(soft power)을 통해 동북아 다자 안보협력을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등은 “동북아 균형자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한미 동맹을 강화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동북아 균형자라는 말은 100년 전인 1904년 러-일 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떠올리게 한다”며 “주변국이 아무도 우리를 균형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어서 결국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 마디로 ‘국내 정치용 외교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한나라당이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균형자 역할론과 비슷한 논리가 지난해 9월 14일 박세일 당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에 의해 제시됐다. 그는 국민대 정치대학원과 월간 중앙이 공동 주최한 ‘한국 보수의 미래’라는 주제의 포럼에서 한국의 미래 전략으로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안했다.
박세일 전의원 제안과 상당부분 일치
박 전 의원은 지금 한국은 대외적으로 세계화, 지식정보화, 동북아 중심시대의 과제를 안고 있다며, 우리 나름의 동북아 구상 즉 독자적인 세계전략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향후 동북아 환경이 중국과 러시아가 한 블록이 되고, 미국과 일본이 또 다른 한 블록이 되는 구도에서 중국과 일본 간의 패권 경쟁이 일어날 것이란 판단을 기반으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인 조셉 나이(Joseph Nye)의 시각을 빌어, 우리가 중국과 일본 사이의 균형자(Balancer)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리가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하면서 성장관계를 만들어 나가려면 한미동맹이라고 하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 전 의원은 “앞으로 한국의 운명이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속에서 새로운 자기 포지셔닝을 해야 하는데, 정치적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제대로 된 브랜드 전략이 나와야 한다”며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이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중국 체제의 변방으로 단순히 편입되지 않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한국은 중국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앞으로 산업화, 도시화, 민주화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중국에 대해 우리가 일종의 솔루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상품일수도, 서비스일수도, 정치일수도, 경험일수도, 지식일수도, 교육일수도, 문화일 수 있으나 어떤 경우에도 미국과 일본의 첨단 기술에 대한 용이한 접근이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와 기술 및 경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경제 발전 경험과 문화적 근접성을 덧붙이고 미래 첨단 기술력을 결합한 국가 소프트 파워를 통해 중국이 앞으로 당면할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한다면 동북아의 균형자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박 전 의원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논쟁에 개입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다만 “한반도 평화를 위해선 단일 패권국가의 등장을 막아야 한다”는 평소 소신을 되풀이했다. 그는 “동북아에 패권국가가 등장하면 한반도가 항상 불행의 역사를 겪었다”며 “그러한 경험이 한국이 결미(結美)를 전제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균형자 역할이 한미 동맹과 모순되지 않는다며 야당 등이 제기하는 회의론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현 정부의 균형자론은 탈미(脫美)의 인상이 짙다고 평가했다. 덧붙여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이분법적 접근은 국내 분열과 혼란만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박 전 의원의 이 같은 견해는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이나 이종석 NSC 차장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 위원장은 “공고한 한미 동맹을 전제로, 한국이 가진 ‘구조적인 힘’을 바탕으로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 위원장은 구조적 힘은 국력의 강약과 직접 관계가 없는 새로운 질서 창출의 능력이며, 새로운 규범과 가치 등을 제안하고 주변국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균형자라고 정의한다. 새 질서 창출은 강대국이나 패권국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어에 다소 차이점은 있더라도 결국 내용은 박 전 의원과 비슷하다. 이종석 NSC 차장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동북아 균형자론‘의 원조는 박 전 의원인 셈이다.
'균형자 역할에 대한 국·내외 인식차 커
원조가 누가됐던 노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 제기는 방법상에서 몇 가지 미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이를 외교상 표준어인 영어로 어떻게 표현 하느냐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한국의 균형자 역할’을 국제정치에서의 ‘힘의 균형자(power balancer)’ 로 이해하는데 그치고 있다.
우리 정부가 설명하는 소프트 파워를 통한 균형자론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이곳 저곳을 다니며 ‘이건 이렇고, 그건 그렇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래리 워츨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이 한국은 경제ㆍ정치ㆍ군사력 면에서 조정 역할을 할 만한 힘이 없다며, 과거 영국과 요즘 인도의 균형자 역할은 그만한 국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가까운 장래에 한국이 동아시아의 떠오르는 패권국들 사이에서 힘의 균형자 (the balance of power)가 될 것은 분명하다”는 미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데빈 스튜와트(Devin Stewart) 한ㆍ일 연구 공동의장과 같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 정부가 설명하는 균형자론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또 하나 문제는 균형자론 천명 이후 한미 동맹을 축으로 한다는 해명이 있었고 이종석 NSC 차장이 미국에 갔지만, 정작 미국은 침묵하고 있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구심을 완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새로운 외교 독트린을 천명하면서 정밀한 사전 정지 작업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