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동서고금을…’전
지금 서울 안국동 사비나 미술관에는 동서양 미술사의 명작그림들이 한무더기로 나와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밀레의 <만종>, 고야의 전쟁화, 김홍도·신윤복의 풍속화 등 40여 점이나 된다. 물론 진품은 아니고, 바랜 영화간판이나 놀이공원의 기념사진용 배경그림판처럼 조잡하게 베낀, 이른바 ‘짝퉁그림’들이다. 한술 더떠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얼굴, 몸은 한 작가와 제자, 모델 등의 사진으로 모조리 바꿔치기되어 있다. 대가들이 빚은 재현의 걸작을 주물러 희롱하는 이 발칙한 게임의 연출자는 3일 개막한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다’전의 작가 권여현(국민대 교수)씨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창조주로 분한 작가와 아담을 대신한 누드모델로 패러디한 것처럼 그림 속 배역모델을 맡은 작가와 제자들은 명화의 유명한 장면들을 제각기 다른 해석과 기법으로 들쭉날쭉하게 재현한다. 그린 이를 특정할 수 없고, 화풍 또한 뒤죽박죽인 그림들은 박제된 신화인 명화 이미지를 복제와 모방에 익숙한 현대미술의 필터로 걸러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가치가 부유하는 이 시대 미술의 정체성 또한 부유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장난처럼 슬쩍 던지는 전시다. 작가는 “미술사를 이렇게 시간여행하는 것이 마냥 재미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4월7일까지. (02)736-4371, 4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