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 대통령의 가벼운 거취 발언 / 정성진 총장

  • 작성일 03.12.16
  • 작성자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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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대선자금에 관한 검찰 수사를 지켜보는 국민의 눈에는 기대와 우려가 교착돼 있다. 모처럼 '안짱''송짱'을 외치며 성원하는 국민이 다수로 생각되지만, 무언가 심층부와의 교감 속에서 궤도 사정(司正)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아주 없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이해 당사자인 정당의 정략적 검찰 흠내기와 경제에 미칠 영향을 마치 시뮬레이션과도 같이 우려하는 재계의 목소리까지 겹치고 보면 우리 검찰도 지금 여간 고단하고 힘든 게 아닐 것이다.

고질화된 불법 정치자금 수수의 고리를 끊고 정치개혁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 국민적 염원이 틀림없다면, 또 대통령도 국회의장도 이번이 바로 그 정치개혁의 최적기임을 공언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제 정치인을 포함한 국민 모두가 명심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일 것이다. 검찰 수사가 국민의 신뢰 위에서 이른 시일 내에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밝혀진 진상을 토대로 국민 감정을 살펴 고해와 사면을 하든지, 다시 대통령 선거자금에 관한 특검을 임명해 수사를 재개하든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불법 대선자금의 수수 경로와 규모에 관한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인 매우 예민한 시점에서, 검찰의 인사권자이자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대선 당시 쓴 불법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 그 정도를 넘으면 정계를 은퇴할 용의까지 표명했다니 비록 자신의 상대적 결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하더라도 그 말이 가져 올 파장이 결코 예사롭지 않을 것임은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그 말은 검찰 수사의 신뢰성을 훼손할 우려가 농후하다. 검찰총장의 출근표정이나 중앙수사부장의 말 한 마디가 뉴스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대통령의 그런 구체성 있는 언급은 자칫 수사의 지침과 한계를 시사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 뿐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솔직한 성품을 드러낸다고는 하지만 선거로 뽑힌 대통령직의 거취를 너무 쉽게, 또 자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국정운영의 안정감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에서,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가 보통의 시민이 투정하듯 가볍게 거취를 운위하는 것은 우선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또한 많든 적든 불법 정치자금의 수수를 시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공개적으로 범법행위를 인정하는 결과가 돼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된다. 물론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상 소추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도 지금까지는 매우 실효성 없는 법률로 인식돼 온 측면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 그 범법행위로서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밝히는 시점과 방법은 일단 숙고했어야 옳다고 본다. 아직 진실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면죄에 관한 국민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불쑥 그런 말이 나온다면 검찰과 국민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라면 마땅히 그런 상황도 배려하는 슬기가 필요하다고 많은 국민은 믿고 있다. 참모와 보좌진은 그런 사항까지도 조언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참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지혜와 경륜이다. 목민심서는 '군자는 무겁지 아니하면 위엄이 없으니(不重則 不威) 백성을 위하는 윗사람(爲民上者)은 마땅히 무거움을 갖추지 아니하면 안 된다(不可不持重)'고 적고 있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느낌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국민이 바라는 것은 빠른 진실의 규명과 이를 토대로 한 정치개혁, 그리고 대통령의 사려깊은 리더십임이 이미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鄭城鎭 국민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