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나의 길 나의 신앙―조현석 ⑴] (국민대 공과대학 동문)

  • 작성일 02.07.18
  •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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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16. - 국민일보 -


너무도 엄격했기에 그리운 아버지
“하나님,아버지가 아프세요.아버지를 낫게 해주세요”

나는 1958년 2월5일 충북 진천의 피란민들만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내가 예수님을 믿었던 동기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1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녔다.겨울엔 어깨까지 쌓여있는 눈을 삽으로 파헤치고 한 발자국씩 건너뛰며 교회에 가 기도했다.그러나 5학년 겨울방학 설날을 13일 앞둔 날 통곡하는 맏아들인 나와 어머니,두 동생을 남겨두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저녁마다 다리가 아프시다며 내게 주물러 달라고 하셨다.그때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마른 연약한 다리였지만 당시 초등학생인 내 손으로는 힘주어 주물러도 아버지를 시원하게 해드리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지금 같으면 매일 밤낮으로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아내가 아프거나 아이들이 아플 때면 항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밤늦도록 다리와 허리를 주물러준다.

아버지는 내게 늘 무서운 분이었다.초등학교 때 나는 대부분 1등을 했다.그러나 성적표를 받아보신 아버지는 알듯말듯 미소만 지으시고 말없이 성적표를 돌려주셨다.

당시 5일장이 서는 읍내장터는 가장 가까운 곳이라도 4㎞ 이상 되었다.아버지와 함께 시장에 갈 때면 나는 서너 발자국 뒤에서 말없이 아버지를 따라가곤 했다.아버지 눈을 피해 친구들과 놀다가 자주 혼났던 일도 생각난다.그 때문에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나는 지금까지도 노는 일에 익숙지 못해 교회에서 야외예배 드리는 날도 어색하기만 하다.내 아이들과 노는 일에도 서투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12월 4㎞나 되는 눈길을 걸어 설빔으로 웃옷을 사주셨을 때이다.옷을 입을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너무 기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아버지는 이런 사랑의 증표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달후 문교부장관상을 탔다.상을 탄 후 이버지의 말없는 눈빛이 그리워 많이 울었다.중학교 3년동안에도 아버지가 사주신 그 옷을 바라보며 자주 울었다.친구에게서 성적이 떨어져 아버지에게 꾸중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등학교 시절 내내 매를 때려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도 했다.

육신의 아버지는 유교의 전통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굶주리게 했다.그 때문에 오히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더 간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더 힘썼다.인간의 형편을 선용하셔서 유익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정리=전재우기자 jwjeon@kmib.co.kr

◆조현석 변리사

△지우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

△서울중앙침례교회 장로

△58년 충북 진천생

△87년 2월 국민대 공과대학 수석졸업

△87년 12월 기술고등고시 제23회 수석합격

△88∼96년 특허청 근무(최단기간 서기관 진급)

△2001년 신지식 특허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