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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냐오차오(鳥巢)와 자연 속의 새 둥지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일 19.08.28
  • 작성자 박차현
  • 조회수 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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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냐오차오(鳥巢)와 자연 속의 새 둥지 

우리는 디자인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기능의 충족일 것이다. 일상의 실용적인 필요를 해결해 주는 역할 말이다. 하지만 기능의 만족만으로는 디자인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유용성 외에 우리는 디자인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의지를 투사하기도 하고,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적이며 문화적인 의식과 유용성의 총합이 디자인이다. 

조현신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은 중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으로 21세기 테크놀로지와 인간 수공의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shutterstock

 

마르크스는 “새가 만든 어떠한 아름다운 둥지도 인간이 만든 하찮은 집에 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새는 본능으로 그것을 만들지만 인간은 의지와 생각으로 설계하고, 그 집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이 만든 집을 통해 우리는 건축가의 의지와 생각을 읽게 되고, 궁극적으로 주체의 존재성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 결과물에 고스란히 녹아든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한 사회주의 사상의 태두다운 선언이기도 하고, 인공 환경이 인간의 존재성을 표현하는 일차원적인 상징이며 기호라는 점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디자인의 위용과 신기술
스포츠는 인간의 행동을 고도의 형식 안에서 표현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디자인이다. 농구, 축구라는 일정한 형식 안에서 선수들은 최대한의 기량과 다양함을 분출하면서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스포츠를 담는 그릇 역시 그런 역동적인 움직임과 긴장의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으며, 그것이 거대한 규모로 구현되는 것이 스타디움이다.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은 스포츠를 담는 그릇으로서 완벽한 설계를 보여 주고 있다. 그곳은 치열한 전차 경주의 장소, 잔인한 살육의 장소, 글래디에이터의 생존을 위한 전투의 장소였다. 하지만 행위의 주인공은 다 사라지고, 그 장면의 목격자인 건축물은 남아 인간 역사의 한 대목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시대의 거대한 스타디움들도 몇 천 년 후에 우리의 행위들을 말해 주는 물증으로 남아 있을까? 


중국은 2002년 국제 설계 경기를 통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의 디자인을 선정하고 ‘돌아온 중국’의 위상과 자존심을 전 세계인에게 각인시키려는 목표로 약 5500억 원을 들여 경기장을 건설했다. 수용 인원은 약 9만 명, 길이 333m, 너비 220m, 높이 69.2m, 연면적 약 25만㎡로 중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 기술의 진수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구현하는 데 인간의 수공이 일일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21세기 테크놀로지와 인간 수공의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은 냐오차오(鳥巢) 즉 새둥지라고 불린다. 이 거대한 새 둥지 경기장은 경기장 건설을 위해 개발된 Q460이라는 고강도 신형 철강재를 사용했다. 굽힘-비틀림 등의 복잡한 구조를 철강재로 엮어 만드는데 나사나 볼트를 쓰지 않고, 철강재를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접합했다. 길림대학교 무금형 성형기술센터는 철강재 곡면을 가공하는 장비를 개발하여 휘어짐을 조정했으며, 중국은 이러한 사실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정확한 대칭을 형성하면서도 무질서하게 보이는 휘어진 철강재들의 조합과 거대한 규모, 그 안의 그늘진 관중석은 이 시대 테크놀로지가 주는 놀라움이며 집단이 함께 누리는 도취적 즐거움일 것이다. 

 


새 둥지와 안티 디자인 
새로운 제국으로 부상하려는 중국의 의지와 신기술, 디자인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이라면, 여기의 대극점에 자리한 진짜 새 둥지를 보자. 새들은 순순히 자신의 본능대로 어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규모와 형태, 물질로 보금자리를 짓는다.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어떻게든 동그란 형상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새 둥지를 컬렉션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이런 새 둥지는 곧 꾸밈없는 삶,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삶의 표현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새들이 만들어 놓은 집을 동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진을 보자. 새 둥지를 그대로 흉내 내 고층 건물 한가운데에 붙여 놓은 저 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그 속에 들어가 세상을 향해 웃어 보이는 것일까? 그는 거대한 규모의 기술과 인간 집단 지성이 열광적으로 만들어 가는 세상의 디자인을 거부한다는 표현으로, 새 둥지를 빌려 온 것이리라. 이렇게 차갑고 거대한 규모로 우리의 몸을 감싸 안으려도 안을 수 없는 콘크리트와 유리, 철강을 거부하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 나무를 선택한 그의 선택은 안티 디자인의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베이징의 냐오차오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서로의 힘을 자랑하면서 함성을 지르는 인간의 본성, 그것을 보장해 주는 과학과 신기술의 증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콜로세움과 만리장성이 남아 있듯이. 하지만 지구상에 새가 출현한 후 같은 모양으로 지어져 왔을 저 연약한 새 둥지 또한 지속될 것이며, 자랑과 위용을 거부하는 안티 디자인 행위 역시 우리 스스로가 자연임을 증명하는 징표로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다. 



새들은 순순히 자신의 본능대로 어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규모와 형태, 물질로 보금자리를 짓는다. @shutterstock


고층 건물 한 가운데 새 둥지를 그대로 흉내 낸 할아버지. ‘거대한 규모의 기술과 집단 지성이 만들어 낸 세상의 디자인을 거부함’을 표현하고 있다.  @shutterstock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 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작년에 <감각과 일상의 한국 디자인문화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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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2251797&memberNo=628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