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찬교 서울 성북구청장(한나라당·62)은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1962년 고등학교(부산고)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한 다음해인 63년 건설부에 배치되면서 공직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성북구청장에 당선되기까지 그의 인생 궤적을 논할 때 40여년에 걸친 공직생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공직 경력도 다채롭다. 건설부,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 서울시장 비서실장, 송파구청장, 서울시 감사관, 강동구 부구청장.....
‘9급에서 구청장’까지 변신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서구청장은 몇가지를 자신있게 꼽았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할 것, 성실할 것, 솔선수범할 것 등이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계속해 대학(국민대 법학과)과 대학원(명지대 지방자치학과)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생활철학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요즘은 아랫사람들에게 하라고 해서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아랫사람들의 기를 살려주고 주민도 섬기는 ‘낮춤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구청장 집무실을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게 만든 것도 구청장의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낮춤의 리더십을 실천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건강을 과신하지는 않지만 건강에는 웬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다. 역설적이랄까. 어렸을 때 가난했던 가정환경이 지금의 건강을 가져다줬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경남 고성군 병산리에 살았어요. 초·중학교가 멀리 떨어져 있어 하루 왕복 40㎞를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한 덕분에 걷는 것은 젊은이들 못지않습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칸트의 시계’처럼 ‘정확’ 그 자체다.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밤 10시쯤에는 잠자리에 든다.
구청장으로서 저녁 약속이 적지 않을 텐데 그런 생활이 가능할까 의아해했더니 그 비결은 바로 금주·금연에 있다고 했다.
그는 한때 제법 술도 마시고 하루에 담배 1갑 이상을 피울 정도로 골초였다. 그러나 20년여 전부터 교회에 다니면서는 둘 다 입에도 대지 않았다. 작년에는 장로(온누리교회) 직분을 받을 정도로 목회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서구청장이 금연·금주운동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성북구에는 ‘사건’이 있었다.
수십년 동안 자동차만 다닐 수 있었던 북악스카이웨이에 멋진 산책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산책로 하나가 주민들에게 가져다준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서구청장은 개통 이후 지금까지 5번이나 찾아가 주민들과 함께 걸었다.
“산책로를 거닐면서 주민들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도로를 만들고 아파트를 짓는 것은 행정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행정은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뚫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서구청장은 재임 중에 성북구를 지나가는 경천철을 유치한 것, 길음뉴타운 지정 등을 주민들로부터 칭찬받은 사업으로 꼽았다.
월곡산에 인조잔디 구장이 만들어졌을 때는 이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이날 테이프커팅을 하는데 으레 내로라하는 지역 유지들끼리 모여 테이프커팅을 한 것이 아니라 주민 1,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주민들이 운동장 트랙을 빙 둘러싸고 준공 테이프를 자른 것이다. 이날 행사 사진은 성북구청 건물 안에 내걸려 있다.
대수로운 행사가 아닐지 몰라도 서구청장은 이런 작은 행사 하나에도 주민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꾸며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강동구 부구청장을 끝으로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접고 2002년 지방선거에서 연고가 없는 성북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서구청장은 “구청장에 당선된 뒤 3년간이 성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기간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1년은 성북이 서울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도약하는 기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