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우리에게 ‘흐르는 물처럼’ 살라하네 / 김영수 일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공자의 사상은 ‘길’이다. 그는 육십이 돼서도 길을 떠났다. 그러므로 그의 철환천하는 죽는다 해도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에 대한 결의를 상징하고 있다. 그의 제자 증자(曾子)는 “선비의 소임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다. ‘인(仁)’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않은가? 죽어서 끝나니 또한 멀지 않은가?(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말했다.
묵자의 사상도 ‘길’이다. 춘추전국의 모든 사상은 ‘길’을 찾고, ‘길’에 따라 살고자 했다. 그것이 장구한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묵자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열흘 낮 열흘 밤을 달려갔다. 묵가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뛰어드는 것”(不愛其軀 赴士之厄困)을 규율로 삼았다.
훌륭하지 않은가? 그런데 노자의 사상은 ‘물’이다. 그는 이런 ‘길 찾기’와 ‘길 가기’(有爲)를 삐딱하게 본다. 그런 성화가 오히려 문제의 근원은 아닌가? 노자에게는 준비된 길이 없다. 어떤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지도 않거니와, 가는 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물처럼 흐르고 흘러 만물을 품어주는 바다에 이를 뿐이다. 가다 막히면 굽이쳐 흐른다. 다투지 않는다. 물길은 하늘의 천성에 따른다.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으로 흐르니 진실로 도와 가깝다. 오직 물처럼 다투지 않아야 진실로 허물이 없다.(老子 8장) 하되 함이 없는 길(無爲)이 진정한 길이다.
‘무위’의 사상은 소극적이고 은둔적이며, 탈정치적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원시적 무정부주의’라고도 한다. 그런데 노자의 무정부주의는 실상 급진적 정치이념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양주(楊朱)나 장자의 개인주의(爲我)와는 다르다. 맹자에 따르면, “묵자는 세상을 위할 수 있다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닳게라도 했을 것”이지만, “양주는 “터럭하나를 뽑음으로서 온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고 해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구세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공자나 묵자에 못지않게 뜨겁다. 방법론이 다를 뿐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참다운 도가 아니요, 이름이라 이르는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
노자의 이 첫 구절은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에서 두 가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첫째, 세상에서 말하는 ‘도’는 참다운 도는 아니다. 둘째, 세상에서 말하는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 요컨대 ‘권위’에 대한 급진적 부정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죄도 어찌 보면 이 두 개의 견해 때문이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젊은이의 존경심을 훼손시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고소되었다. 정치공동체는 진리에 대한 하나의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고, 근대 이전에 그것은 대개 종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또한 그런 신적 진리는 지상의 권위, 즉 사제나 왕, 아버지, 교사라는 ‘이름’에 의해 대변된다. 왕권이나 부권의 지배는 천명 혹은 천륜으로 정당화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philoso phy)함은 이런 권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것들의 신성함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아테네의 ‘등에’로 자처한다.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전기가오리에 감전 당한 듯한 불쾌함”을 느낀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진리가 공격당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노자’ 전편에 흐르는 사유는 전복적이고 도전적이다. 공자나 묵자는 무도한 시대를 비판했지만 ‘천도’를 확신했다. 공자는 “이름을 바로 잡는 것”(正名), 즉 군신과 부자 관계의 정상화를 정치의 급선무로 생각했다. 그러나 노자는 ‘이름’ 자체를 의심한다.
이름을 정당화하는 인의(仁義)나 혜지(慧智)는 진정한 도가 사라진 뒤에 나타난 임시방책과 같은 것일 뿐이다. 현자의 존숭(尙賢)이라는 묵가의 주장도 오히려 공명심을 부추겨 싸우게 할 뿐이다. 훌륭하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없지만, 훌륭한 일을 하려는 마음도 비워야 한다. 모든 것을 사람들의 자연스런 정서에 맞추어 하고, 그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야 한다. 그릇의 쓸모는 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릇의 빈 부분에 있다. 국가와 정치도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요, 그 속에 담긴 삶들을 위한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18/20070418010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