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나 그런 교수는 있다. 대동제가 끝나고 교정에 남은 흐드러진 술판의 흔적을 손가락질하며 혀를 끌끌 차는 교수들. 왜 휴지를 함부로 버리냐며 꾸중하는 교수도 있다. 요즘 애들은 고생을 몰라 낭비가 심하다고 개탄하는 교수도 있다. 하지만 손을 번쩍 들고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목소리 높이는 교수는 드물다. 배운 자의 역할에 대해 정성을 다해 설득하는 교수도 찾아보기 힘들다. 경쟁사회에서 눈치 빠르게 적응하는 기능인을 길러내느라, 어느새 우리 대학은 사회의 속도와 관습에 저항하는 동력을 잃었는지 모른다.
고담준론 떨쳐버린 행동조직 윤호섭(시각디자인), 이창현(언론정보), 전영우(산림), 전용일(금속공예), 조중빈(정치학), 한경구(일본학). 국민대학교 6명의 교수들은 여전히 대학의 새로운 가치에 대해 꿈을 꾸는 ‘선생님’들이다. 이들은 2003년부터 꾸준히 녹색 캠퍼스 운동을 벌여왔다. “녹색 캠퍼스는 단순히 교정을 푸르게 가꾸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교직원 모두 환경친화적인 인식을 갖는 캠퍼스입니다. 발전지상주의자들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회색 지식인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지식을 생산하는 녹색 지식인을 길러내는 곳입니다.” 이창현 교수는 녹색 캠퍼스가 공간의 변화뿐 아니라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돌이켜보면, 내게 지금도 가장 중요한 사람들, 의미 있었던 책, 음악은 대부분 20년 전 대학 시절에 만났습니다. 우리 학생들도 20년쯤 지나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녹색 캠퍼스의 경험이 이후 환경의 가치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데 중요한 정서적 바탕을 이루길 바랍니다.
녹색 캠퍼스 운동은 지난해 1월 이창현 교수가 대학신문사 주간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대학 언론 차원에서 학교 구성원을 대상으로 공익적인 캠페인을 벌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 교수는 북한산에 둘러싸인 국민대의 아름다운 환경을 제대로 살려보기로 했다. 뜻을 품으니 그 다음은 동지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조물주가 애초에 지구에 펼쳐놓은 디자인의 정신을 살려야 한다”며 일찌감치 ‘그린 디자인’을 주창해온 윤호섭 교수를 비롯해 우리나라 숲에 안식년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산림대학의 전영우 교수, 동강·새만금 살리기 등에 참여한 인류학자 한경구 교수, 새로운 벼룩시장의 모델을 고민하던 전용일 교수, 대학에서 자연에 대한 깊은 공부가 절실하다고 주장해온 조중빈 교수가 녹색 캠퍼스 운영위원회로 뭉쳤다. 운영위원회는 테이블에 앉아 고담준론을 논하는 교수 조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행동 조직이었다. ‘그린 디자인’의 전파를 위해 일요일마다 인사동에서 천연염료로 만든 환경 티셔츠를 나눠주는 윤호섭 교수처럼, 강력한 실천주의가 녹색 캠퍼스 운영위의 기본 태도였다. 할 일은 많았지만 의욕이 앞섰다. 교수들 저마다 “학교 일 하면서 이처럼 즐거워해본 적이 없다”는 탄성을 쏟아냈다.
먼저, 대학신문은 녹색 캠퍼스 운동의 핵심 기지가 됐다. 매주 차 없는 캠퍼스, 숲과 함께하는 캠퍼스, 물을 사랑하는 캠퍼스, 재활용하는 캠퍼스 등 녹색 캠퍼스를 실천하기 위한 주제를 제시하며 이를 특집기사로 다뤘다. 윤호섭 교수는 여기에 적절한 공익광고를 만들어냈다. 타이어 안에 꽃이 가득 피어난 장면, 국민대를 품고 있는 북한산 이미지를 살린 티셔츠 사진 등 눈을 잡아당기는 강렬한 이미지들을, 윤 교수는 매주 쉼 없이 정열적으로 생산해냈다.
교수 · 학생 · 교직원들의 아이디어 반짝여 변화는 때론 서서히, 때론 급작스레 일어났다. 교정에 자동차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대학 당국도 지하주차장이 완공되는 2004년 봄학기부터 자동차의 교내 진입을 금지하겠다는 원칙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교정 곳곳에 분리수거함이 설치됐고, 녹색 캠퍼스 운동의 취지에 공감한 ‘아름다운 가게’도 2주일에 한번씩 학교를 방문해 재활용 물건들을 펼쳐놨다. 교수회의에서도 종이컵을 쓰지 않고 유리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숲의 가치를 제대로 느껴보자는 뜻으로 학생과 교직원들이 함께 광릉숲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녹색 캠퍼스는 방학에도 쉬지 않았다. 여름방학에 대학신문사는 ‘녹색 캠퍼스 아이디어 공모전’을 벌였고, 교수와 학생들에게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받았다. 학교 안에 자라는 식물들을 조사해 기록한 식물도감, 새로운 실내조경 계획, 학교 안을 흐르는 북한산 지류의 활용, 태양광 발전기 도입, 북한산 박물관 건립 등 당장 실현 가능한 것부터 중장기적 계획까지 제시했다.
2003년 2학기부터 6명의 교수들은 공동으로 교양강좌를 개설했다. ‘북한산과 녹색캠퍼스’. 이 강좌를 신청한 학생들은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는 수강생이 아니라 ‘녹색 전사단’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녹색 전사단은 캠퍼스를 바꿔나가기 위한 핵심 조직으로서 5인1조로 팀을 짜 한 학기에 걸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자기 컵 이용하기, 도서관 뒤 계곡 조경계획, 식당 음식물 쓰레기 절감 방안, 내가 버리는 1주일 동안의 쓰레기 분석, 생활관 내에서의 분리수거 방안, 버려진 넥타이로 치마 만들기, 종이 재활용을 위한 제품 디자인, 나의 녹색일기, 식당에서의 냅킨 절약방안 등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프로젝트들이 이뤄졌다.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벼룩시장은 수강생 전원이 참여했는데, 교수와 학생 모두 종이 좌판을 받아 물건에 얽힌 사연과 가격을 적어놓고 판매에 나섰다. 이번 학기에 강의를 듣고 있는 배나정(21)양은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 생각했던 학교 뒷산에 직접 올라가면서 새삼스레 자연의 가치에 눈뜨게 됐다. 벼룩시장에 참가한 이후론 물건 하나를 버릴 때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5월1일 국민대는 학교 전역이 차가 금지된 ‘차 없는 캠퍼스’로 정해짐으로써 녹색 캠퍼스 운동은 소중한 결실을 맺었다. 차가 다니던 길과 주차장에는 녹색 전사단이 자기 이름을 적은 화분을 놓아 차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했다. 길 양옆에 자동차가 가득 주차돼 있어 좁기만 하던 도로가 차를 걷어내자 뻥 뚫린 거리광장처럼 변했다.
이제 녹색 캠퍼스 운영위원회는 차가 지배했던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놓고 즐거운 궁리 중이다.
“대학 경쟁력 평가에 ‘녹색지수’ 필요” 이창현 교수는 “차가 없어지자 학생들의 동선이나 공간의 이용행태가 달라졌다. 과거엔 빨리 지나가야 할 통과 도로에 불과했던 곳이 이제는 발길이 머물고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변했다. 이에 맞춰 캠퍼스 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 없는 캠퍼스’는 중간 과정일 뿐이다. 녹색 캠퍼스의 목적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국민대만이 아니라 모든 대학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교육부에 대학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데 ‘녹색지수’를 도입하도록 제안할 생각입니다. 녹색지수는 절전·절수·분리수거 등 기본적인 항목들을 바탕으로 해서 실천을 강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이 진행된 과정은 최근 간행된 <녹색캠퍼스를 꿈꾸며>(이크 펴냄, 9천원)에 소상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