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우리가 숲을 버리면 숲도 우리를 버렸다 / 김기원 (산림자원학과) 교수
오대산 월정사 입구 전나무 숲길을 걸어본 이라면 누구나 비의(秘意)와 까닭 모를 전율을 잊을 수 없을 게다. 가없는 고요와 평온은 시간이 정지된 태초의 느낌 그대로인 듯하다. 오감으로 전해지는 숲의 장엄함과 숭고함에 위대함이 더해져 열락의 경지로 몰입시킨다. ‘느림’과 ‘비움’의 덕목을 여기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지 않을까 싶다.
전나무 숲의 청량한 냄새는 탄소와 수소가 결합된 바늘잎에서 뿜는, 향기로운 휘발성 기름 테르펜에서 비롯된다. 모든 숲에는 나무에서 풍겨나오는 식물성 살균물질인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있어 몸이 맑아진다고 한다. 누군가 숲을 ‘마음을 치료하는 녹색 병원’에 비유한 것은 그래서 적실한 것 같다.
산림학자 전영우가 권하는 ‘숲 오감 체험 10계명’을 이곳에서 실천해 보면 금상에 꽃을 올려놓는 기분이리라. 1.장대비 오시는 숲의 흙길을 맨발로 걸어 봅니다. 2.바람 부는 날에는 숲 속에 발을 고정시키고 숲을 노니는 바람에 온 몸을 맡깁니다. 3.나무줄기에 귀를 대고(청진기면 더 좋습니다) 나무 몸통 속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 봅니다. 4.눈 오는 날에는 숲 속 나무와 함께 머리와 어깨에 눈을 쌓아 봅니다. 5.아무런 불빛도 없이 한밤중 숲길을 걸어 봅니다. 6.눈을 감은 채 울퉁불퉁한 열매를 만져 보고, 가시에 살짝 찔려도 봅니다. 7.숲에서 나는 향기를 말로 한 번 표현해 봅니다. 8.나무에게, 숲에게, 자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봅니다. 9.자연을 예찬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봅니다. 10.깊은 숨을 쉬면서 내 들숨에 나무의 들숨이 들어 있고, 나무의 들숨에 내 날숨이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나무와 숲과 나는 하나입니다.
숲에 관한 책들은 대개 생태학이나 숲 감상으로 심금을 사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중견 산림학자이자 실천가인 김기원 국민대 교수의 ‘숲이 들려준 이야기’(효형출판)는 그런 책들에서 맛보지 못하는 색다른 간접 체험의 공간이다. 이 책에서는 숲이 신화, 예술, 문학, 철학과 교유한다. ‘문화 없이 숲 없고 숲 없이 문화 없다’고 한 오스트리아 산림학자 조셉 베셀리의 말이 단초가 된 듯하다.
책은 숲의 시원(始原)으로 먼저 거슬러 올라간다. 4억년 전쯤 숲의 조상 ‘프실로피톤’이라는 바다 식물이 상륙해 조성되기 시작한 숲은 시나브로 진화한다. 이렇게 태어난 숲은 신화와 예술로 800만년 전쯤 탄생한 인류와 만난다. 인류가 숲과 만난 게 아니라 숲이 인간을 낳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숲은 문화의 산실인 것이다. 이를테면 나무는 신이고 숲은 신전이다. 나무가 악기가 되면 숲은 콘서트홀이 된다. 나무가 미술이면 숲은 미술관이다. 나무가 시면 숲은 소설이 된다. 숲은 철학자에겐 사색과 지혜의 터전이다.
세계의 수많은 신화는 공교롭게도 나무와 숲에서 시작된다. 단군왕검의 신단수(神檀樹), 동양의 우주수 뽕나무, 북유럽 신화에서 우주를 다스리는 지혜의 나무 이그드라실, 아리안 족이 숭앙했던 참나무, 물푸레나무에서 인간이 창조됐다는 북미 대륙의 원주민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의 숲이 그렇듯이.
지은이는 숲의 아름다움을 아홉 가지나 든다. 생명성, 정연성(整然性), 순결성, 유연성, 연출성, 다양성, 영속성, 감각성, 신성(神性).
우리가 숲을 버리면 숲도 우리를 버렸고, 숲의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인간 삶의 위기라고 일침을 놓는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산림 파괴의 역사”라고 일갈한 캐나다 산림생태학자 J P 키민스의 경고를 앞세워. 인류는 창조주의 가르침이 있는 에덴동산 숲과, 나무 곁에서 득도와 해탈을 한 부처의 지혜의 가르침이 있는 룸비니 동산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저자의 마지막 말이다. 여름 휴가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즈음 숲의 소리 없는 가르침을 들으며 일과 휴식의 경계를 넘나들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출처 : 경향신문 기사입력 2008-07-04 17:53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1964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