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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구 (주)우산 대표 / (경제학과 71 동문)

  • 작성일 15.08.21
  • 작성자 박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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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구 (주)우산 대표. ㈜우산 제공

우신구(64) ㈜우신 대표는 전국 1천500개 자동차부품대리점을 대표하는 한국자동차부품판매업협동조합 이사장이다.

상주 산골짜기에서 ‘사변동이’(1950년생)로, 9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난 우 대표는 잘 나가던 정미소 집 아들에서 화폐 개혁으로 하루아침에 등록금 540원을 내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대학에서 위수령 반대 데모를 하다 제적당한 뒤 군으로 강제 징집되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굴곡의 삶을 겪은 그는 다양한 경험과 경륜을 쌓은 뒤 영업의 달인이 됐다. 신용과 베풂의 실천을 통해 성공 신화를 일군 우 대표로부터 삶의 역정과 노하우를 들어봤다.

-유년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지 4개월 만에 태어난 ‘사변동이’다. 4남 5녀의 여섯째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는 아버지가 고향에서 정미소와 과수원을 운영해 꽤 형편이 좋았다. 

정미소에서 벼와 보리를 가공하기도 했지만, 보관하는 역할도 했다. 농사지은 벼를 보관하다 정부 수매에 맞춰 가공한 쌀을 넘기고 돈을 받아 운용했다. 이듬해 봄에 벼를 맡긴 농민들에게 쌀이나 벼로 돌려주는 경영을 한 것이다. 정미소 운영이 잘 돼 집안 형편도 날로 좋아졌다.

하지만, 1962년 화폐 개혁 이후 쌀값이 3배 이상 뛰는 바람에 가산을 모두 탕진하게 됐다. 5천원을 주고 산 쌀을 1만5천원에 되돌려주는 상황이 된 셈이다. 초교 5학년 때부터는 등록금 540원을 내지 못해 늘 교무실에서 혼이 나곤 했다. 이후 학창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릴 적 잘살던 경험으로 자존심만큼은 항상 강했다. 어려워도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대학에서 제적을 당했는데

▶1971년 국민대에 들어가 흥사단 활동에 매력을 느꼈다. 민족부흥과 통일에 대한 신념을 갖고 열심히 활동했는데, 73년 위수령 반대 등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이다 경찰서를 수차례 들락날락했다. 70년 위수령 발동, 72년 유신헌법 등으로 대학은 물론 사회 전체가 준 계엄령 상황이었다. 일체의 학내활동을 금지한 상황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이다 결국 제적을 당하고 강원도로 강제징집을 당했다.

-직장생활은

▶군 제대 후 후지필름에 입사했다. 일본계 회사인데다 적성에 맞지 않아 2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친구가 근무하는 구로공단 비철금속회사에 영업직으로 들어가게 됐다. 수도꼭지, 밸브회사 등에 사용되는 비철금속인 ‘황동봉’(구리와 아연 합금)을 만드는 회사였다. 창원공단 내 부산포금이라는 회사가 납품물량의 80%를 담당하는 주 거래처였다. 주 거래처만 믿고 설비에 과잉투자를 하는 바람에 결국 부도났다. 이 회사의 부도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회사 부도로 교훈을 얻었나

▶회사가 어떻게 장사를 해서 성장하고, 어떻게 망하는지를 지켜봤다. 이러던 차에 제일제당에 근무하는 직원과 예비군 훈련을 같이 받다 대리점 운영을 권유받았다. 연고가 전혀 없는 전북 전주에서 제일제당 대리점을 운영했다. 여기서 2가지 영업 원칙을 통해 큰 실적을 올리면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첫 번째는 신용이었고, 두 번째는 새로운 판로 개척이었다. 고객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당시 명절 선물로 설탕과 조미료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는데, 신용이 쌓이면서 매출이 꾸준히 올랐다. 한편으로 토종꿀 생산업자와 양봉업자들과 새로운 거래처를 텄다. 남원, 운봉, 순창 등지에 토종과 양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상대로 설탕 공급 루트를 뚫은 것이다. 돈을 벌어 서울 강서구에 임대용 공장 터도 매입하는 등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당시 대리점 동료와 함께 최초의 유통체인회사인 한남체인본부 전주지부를 추가로 공동 운영하면서 기존 대리점 사업마저 접어야 했다. 동료가 어음을 잘못 빌려주는 바람에 부도가 나버렸다.

-어떻게 재기했나

▶대리점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터였다. 업계에서 이름이 났고, 럭키금성 영업소장이 의정부 대리점을 권유했다. 동두천, 포천, 철원 등지가 영업구역이었다. 기존의 영업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매출이 눈에 띄게 신장했다. 시제품이 나오면 시장에서 직접 시연하고, 영업점 주들을 설득해 우리 제품을 가장 좋은 위치에 직접 진열할 수 있도록 했다. 물건이 잘 팔리면서 점주와 대리점이 윈-윈하는 구도로 이어졌다. 지역을 돌아가면서 도매물건을 할인가격에 파는 것을 ‘루트 세일’이라고 하는데, 매출이 시원찮더라도 반드시 루트 세일 약속은 철저히 지켰다. 의정부 대리점이었지만, 면도기의 경우 서울을 제치고 전국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업종을 전환하게 된 계기는

▶대리점 영업이 상당한 매출을 올리면서 2003년 어느 날 현대에서 연락이 왔다. 현대차 부품공급센터를 맡아달라는 거였다. 생활용품 대리점 운영권을 동생과 친지 등에게 넘기고 자동차부품 유통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현대모비스 부품지원센터 중 서울을 크게 나눠 서쪽을 맡게 됐다. 영등포`동작`구로`용산`종로 등지와 경기도 파주`고양 등 일대였다. 현대차와 기아차 지정 카센터와 정비업소에 소모품을 제공하고 있다. 처음 인력난을 겪으면서 ‘소사장제’를 도입, 효과를 톡톡히 봤다. 현재 직원 20명 중 영업구역을 세분해 소사장 8명을 두고 있다. 처음엔 단순 봉급쟁이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구역을 나누면서 ‘내 회사’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면서 영업수익이 크게 늘었다.

-사업에 성공한 요인은

▶신용과 베풂이다. 영업과 사업의 첫 번째 원칙은 신용이자, 신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정식 계약이 아니라 구두 약속이라도 철저히 지켰다. 세금이나 임대료가 밀린 적이 없고, 월급을 단 한 번이라도 미룬 적이 없다. 또 서로 돕고 베푸는 자세를 항상 갖고 있다. 대리점 영업을 하는 동안 주변의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을 받은 만큼 나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배경은

▶사회적으로는 어려운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정치적으로는 간도되찾기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새누리당에서 10년가량 나눔봉사위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농촌일손돕기, 헌옷 수집 베풀기 봉사, 성남 ‘안나의 집’ 무료급식 봉사, 태안 앞바다 기름띠 제거활동 등을 펴왔거나 현재 활동을 벌이고 있다. 3년째 나눔봉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앞으로도 차상위계층 등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 대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계획이다.

-간도되찾기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나

▶중국 만주 길림성 동남부, 연변지역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다. 일제는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 맺고 철도부설권과 광산채굴권 받고 간도 땅을 넘겨줬다. 현재 중국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지만, 통일이 되면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땅이다.

경기도 동두천에 매입한 공장터가 있는데, 4년여 전부터 간도문화체험마을을 만들려고 준비했다. 현재 간도 관련 책자와 사진 등 각종 자료, 정계비 모형, 전시실 등을 갖춰 연수원을 건립하고 있는데, 오는 10월 초 개관하려고 한다. 간도되찾기운동본부 육락현 대표가 간도 관련 책자 5만 권 등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는데, 이를 전시실에 선보일 계획이다.

대학에서 간도 관련 석사논문을 냈고, 박사과정도 간도 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앞으로도 여생을 사회봉사와 간도되찾기운동에 전력을 쏟을 생각이다.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406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