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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 그, 그녀, 행운의 시작 - 포츈쿠키 / 유희종 (시디 94)

  • 작성일 06.10.27
  • 작성자 조영문
  • 조회수 20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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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남자

그는 말없는 소년이었다.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단 혼자 음악 속으로 빠져드는 게 좋았다. 중1 때부터 ‘전영혁의 음악세계’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탐미했다. 라디오 키드.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음악이 좋았지만 차마 남들 앞에 나서 음악을 할 용기가 없었다. 고3 때 갑자기 미술을 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던 아트록 음반들의 예술미 넘치는 재킷을 보고 ‘미술을 통해 음악 관련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운 좋게’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합격했다.

대학생이 된 그는 기타 학원에 다니고 학교 밴드 오디션도 봤지만 돌아온 건 쓰디쓴 좌절감뿐이었다. 대학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영화음악도 직접 만들기로 했다. 독학으로 작곡법이며 미디(컴퓨터 음악)며 공부했다. 그가 만든 음악을 녹음한 스튜디오 사장이 말했다. “넌 음악을 해야 해.” 난생 처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날아갈듯 기뻤다. 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결심하고 보컬을 찾아 나섰다. 그의 이름은 유희종이다.

2. 그 여자

소녀의 꿈은 화가였다.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유치원 때 미술 최고상을 받았고 예중, 예고를 거치며 꿈을 영글게 했다. 소녀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가족 나들이라도 할라치면 차 뒷자리에 앉아 연신 노래를 불렀다. 어버이날엔 노래를 불러 녹음한 CD를 부모님께 선물했다.

서울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어느날 친구들과 행위예술 퍼포먼스를 했다. 말 대신 괴성과 몸을 두드려 내는 소리로 의사소통하는 퍼포먼스. ‘내 몸에서 이렇게 신기한 소리가 나다니.’ 노래 부르기보다 재밌었다. 졸업하고 CF 관련 회사에 들어갔다. 재미 없었다. 곧 그만뒀다. 길거리 공원에서 시민들과 함께하는 미술 퍼포먼스를 했다. 전시만 하는 그림보단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술행위가 더 좋았다. 누군가가 노래 부를 사람을 찾는다 했다. ‘음악도 사람들과 어울려 의사소통하는 거겠지.’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녀의 이름은 홍보람이다.

3. 만남 그리고 행운의 시작

남자는 여자를 보자마자 ‘같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연을 중시하고 쉽게 거절 못하는 성격. 둘 다 음악을 잘 모른다는 점도 되레 편했다. “노래를 참 잘한다”고 칭찬했다. 이런 얘길 난생 처음 들은 여자는 ‘내가 정말 필요한가봐’라고 생각하며 수락했다. 2001년 여름이었다.

작업을 하다보니 성격이 정반대임을 알게 됐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스타일의 여자는 곡도 10분만에 후딱 써버렸다. 섬세하고 예민한 스타일의 남자는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처음엔 갈등도 많았지만, 서로 도움이 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됐다. 2004년 첫 앨범 <행운의 시작>을 냈다. 당시로선 흔치 않은 라운지 음악.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르로 데뷔한 클래지콰이와 함께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페이크 러브 송’과 ‘시에스타’는 광고음악으로 쓰였다.

“음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점점 많아져요. 음악을 안했다면 이런 생각들을 못했을지 모르죠. 음악은 제게 삶에 대한 성찰을 끊임없이 하게 하는 거룩한 의식과도 같아요.”(유희종)

그래서일까? 늦어도 11월 이전에 나온다는 2집 앨범의 몇 곡을 미리 들어보니 더 깊어지고 씁쓸해졌다. 1집의 달콤하고 나른한 느낌은 간데 없다. 음악적 성장기를 지나는 듯, 포츈 쿠키는 아직 진행형이다.

“앞으로 우리 음악이 어떻게 변할진 우리도 몰라요. 틀에 박힌 거 싫어하거든요. 우리에겐 계획이 없어요. 참, 저 10~11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도 해요. 놀러오실거죠?”(홍보람)

출처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