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해 1번지 울산’ 환경운동 초석 다져 / 한기양 (경영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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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공추련을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 공추련 지역 조직의 성격을 띠고 출발했다. 사진은 1992년 8월 전국 환경단체 수련회에 참석한 울산공추련 활동가들. |
울산공추련의 창립을 주도한 한기양, 현 울산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있는 김장용·오영애(왼쪽부터). |
울산 북구 송정동에 위치한 울산환경운동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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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단체 통합 논의에 참여한 지역 환경운동가들. 왼쪽부터 구자상(부산)·문창식(대구)·임낙평(광주)·이인식(마산·창원). |
최열 초청 첫 공해교실 열어
1988년 12월 그는 본업인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최열을 초청해 첫 공해교실을 열었다. 자신의 조그만 자취방에서였다. 개척교회 창립 예배에 들어간 것은 그보다 한 달 뒤인 1989년 1월 17일이었다. 교회는 말 그대로 예배드리는 곳이자 공추련 사무실이었고,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자연히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사의 출입이 잦았고, 이에 따라 그 역시 요시찰 인물이 됐다.
울산공추련은 이런 가운데 1989년 7월 3일 출범했다. 원래 이날은 준비위원회의 발족일이었다. 그런데 조직을 정비하기도 전에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 저지운동 등에 매달리느라 정식 출범식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준비위원회 상태에서 공식 발족을 못 하고 일에 파묻혀 나중에 ‘발족한 걸로 하자’고 하고 창립총회를 했다”고 최근 회고했다(1991년 11월 9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산화티타늄 공장 반대운동을 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울산을 대표하는 환경운동가가 됐다. 그의 환경운동은 당시의 운동권 출신 환경운동가들처럼 좌파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인다. 초기에 그는 매우 ‘액티브한’ 운동을 펼쳤다. 10여 차례의 공해추방 캠페인과 이산화티타늄 공장 설립 저지를 위한 시민서명운동, 그리고 앞에 언급한 천막 단식농성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그는 신앙인이었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그는 생명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된다. 2년여 동안 싸우면서 인간사회의 갈등(노동자 문제)보다 피조세계 자체가 신음하는 상황을 푸는 것이 선차적 사명임을 인식한 것이다(2002년 효성교회를 새생명교회로 개명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만 해도 기독교 환경운동권에서는 해명하기가 곤혹스러운 성경 구절이 있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구절이 환경파괴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충만하라’의 원어에는 ‘충족시켜라(fulfill)’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복하라’에도 ‘경작하라(culture)’는 뜻이 있다.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도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라는, 즉 ‘생태계를 보전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1998년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울산의 많은 환경 이슈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의 반대운동으로 듀폰은 1992년 이산화티타늄 공장 건설을 포기했다. 한국티타늄도 그가 활동한 기간 동안은 공장을 세우지 못했다. 1994년과 1995년에는 울산의 하천과 해양 환경에 대한 종합보고서 격인 ‘울산수질환경지도’와 ‘울산해양환경지도’를 펴냈다. 1992년 리우회의에 다녀와서는 ‘지방의제21’ 계획안을 제안, 울산시가 친환경 정책을 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물러난 뒤 울산 환경운동의 바톤은 김장용(현 울산환경운합 대표)·오영애(현 울산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가 이어받게 된다. 김장용은 울산공추련 시절부터 회원 활동가로 현장을 누빈 울산 환경운동의 산 증인이다. 오영애는 울산대 학생운동권 출신(83학번)으로 민추위 활동, 위장취업, 노조운동 등을 거쳐 1998년 환경운동으로 전업했다.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큰 울산에서 노동운동가 출신 환경운동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시 1991년 7월 1일 상황으로 돌아오면, 한기양이 천막농성 중에 기다린 손님은 전국 환경운동가들이었다. 서울의 공추련과 각 지방 환경단체 대표자들이 이산화티타늄 공장 반대투쟁 지원차 농성장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날 공추련 의장인 최열을 비롯해 서울·부산·대구·광주·울산 등 6개 환경단체 대표 20여명이 농성장을 방문했다(한겨레신문 1991년 7월 2일자). 한기양의 기억에 의하면 부산의 구자상, 대구의 문창식(현 대구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 광주의 임낙평(현 광주환경운동연합 의장), 마산의 이인식(현 마창환경운동연합 의장) 등이 참석했다.
‘아시아 최대 단체’의 초라한 출발
이 모임이 중요한 까닭은 전국적인 환경운동 조직 결성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논의된 자리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석한 각 지역 활동가들이 지금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환경운동의 리더들이다. ‘아시아 최대의 환경운동단체’로 일컬어지는 환경운동연합 조직 작업이 허허벌판의 허술한 천막에서 차도 다과도 없이 한 끼를 굶으면서 맹물을 앞에 놓고 이뤄지기 시작한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주인이 단식을 하고 있으니 맹물밖에 대접할 게 없었지만 소득은 굉장했다. 합의된 사안 중 큰 건만도 3가지였다. 우선 전국 조직의 건설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시민환경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세 번째가 다음해 열리는 리우회의에 모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전국 조직 결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조직을 통합하는 것은 구조조정에 버금가는 일이다. 조직마다 고유한 사정과 이해득실과 나름대로의 기득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이 의외로 쉽게 풀린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최열의 기억을 빌려보자.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지역에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큰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중앙에서 내려가야 일이 됐다. 사안이 발생하면 지역에서 먼저 대응해야 하고, 또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중앙의 힘을 빌려야 할 부분도 있다. 이런 게 잘 안되니까 각 지역에서도 연대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1990년대는 ‘환경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형 환경사안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다.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단체의 일이라기보다 전국적이고 총체적인 사안이 많았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스펙트럼을 넓혀가기에는 당장 발등에 떨어지는 불덩이가 너무 컸다고 할 수 있었다.
최열은 공해문제연구소 시절부터 공해 현장뿐 아니라 지역이나 단체를 방문해 강연하는 등 ‘환경전도사’ 역할도 소홀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하루에 6번 강연한 적도 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환경문제에 관한 한 실핏줄처럼 전국 구석구석까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네트워크와 상징성이 통합의 강력한 구심점 노릇을 한 점도 전국 조직화를 용이하게 한 측면이 있다.
큰 매듭이 풀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아주 지엽적인 것이라도 고약하게 엉키면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아시아 최대 환경운동단체’의 출범을 둘러싼 산고(産苦)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신동호 NIE연구소장 hudy@kyunghyang.com>
출처 : 2007 01/16 뉴스메이커 708호